강화도조약을 맺고 문호를 열게 되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1820년 영조의 고손자인 남연군 이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에게 학문을 배운 이하응은 1843년(헌종9) 흥선군에 봉해졌다. 이하응은 왕족이었지만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밑에서 불우하게 지냈다. 그 당시 똑똑한 왕족을 죽이기까지
. 서 론
우리는 흔히 일본을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한다. 지리적으로는 이웃이라고 할 만큼 가깝지만 두 나라간의 오랜 역사 관계는 이웃국가라는 말을 쉽게 하지 못 하게 만들 정도로 결코 가깝다고 할 수 없는 관계였다. 우리의 고대 삼국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한반도와 일본 열도의 교류는
2. 명성황후의 인품
명성황후의 생전의 인품에 대해서는 그녀의 사후를 기록한 행록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데 어려서부터 성품이 단정하고 아름답고 총명하였던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장영숙, “서양인의 견문기를 통해 본 명성황후의 정치적 위상과 역할”,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선임연구원
조약(1858)을 모방한 이 조약의 체결로 조선은 일본에 부산·원산·인천의 3개 항구를 개방하고(제5조) 치외법권을 인정했으며(제10조), 일본화폐의 통용과 무관세 무역을 인정했다(통상장정).
또 제1조의 내용은 조선과 청국과의 관계를 끊고 일본이 조선에서의 우위를 차지하려는 저의가 담긴 것이고, 제
조약이라고도 한며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나 불평등 조약. 이 조약 이후로 조선은 서양 여러 나라와 통상을 시작하게 되고, 문호를 개방함으로써 서양의 신문명을 수입하는 반면에 열강의 침략을 받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1884 갑신정변 - 친일 개화파가 일으킨 정변으로 민씨정권을 무너
정권을 잡고 있던 민 씨 정권을 향해 반란을 일으킨다. 이로 인해 명성황후는 궁녀로 변장해 피신하고,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한다. 하지만 명성황후는 다시 청나라를 이용하여 대원군을 쫓아내고 권력을 탈환한다. 청나라는 명성황후를 통해 다시 한 번 조선에 대해 세력을 다지고 일본은 임오군란으로
강화도조약을 체결, 나라의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그 이후 조선은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등 여러 나라와 통상수호조약을 맺어 개화기를 맞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력이 약했던 대한제국의 한반도는 열강의 각축장이 되고 말았다. 조선은 그 난관을 극복하지
등거리외교를 통해 서로 견제를 유도하려는 고종의 노력이 포함되었던 것이다.
2. 운요호사건과 개항
일본은 1875년 중무장한 군함 운요호를 강화도 초지진에 접근시켜 조선 측의 발포를 유도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일본 내 반한감정을 고취, 대규모 파병준비를 하면서 수교회담을 요구하였다.
조약체제가 확립됨.
○ 일본
존왕(황)양이파의 부상 - 1860년 3월 개방파인 井伊 살해 보복. 1860년대 중반에는 개항을 반대하여 시작된 양이운동이 도쿠가와 정권 타도를 목적으로 하는 혁명투쟁의 성격을 띰. 1868년 왕정복고하여 메이지 천황 추대.
4. 한국의 개방과 동아시아 세계질서의 종국
(1)